도덕경을 읽고

-이글은 1995년 5년만(입학후 10년)에 대학에 복학 했을 때 <중문학개론> 수업 리포트로 쓴 글이다

by 오도

 

1

들어가며

어느 신문엔가 ‘내 인생의 책들’이라는 고정란이 있었다. 인생을 말하기 계면쩍은 나이이다. 하지만 내게도 충격을 준 책이 몇 권 있다. 그 처음은 감수성으로 꽉 찼던 고등학교 시절,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 망명한 석학 에리히 프롬이 쓴 『소유냐 존재냐』다. 생각해보면 서구인 중에서는 드물게 동양적 직관의 세계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던 프롬은 책에서 ‘소유(to have)를 버리고 존재(to be)를 추구하라’고 주장했다. 얼마나 매료 됐던지 방 책상 앞에 구절들을 써 붙여 놓고 달달 외우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그 첫 충격은 길지 못했다. 1985년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는 초헌법적인 독재 권력과 그에 항거하는 사회운동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이른바 ‘민중’,’변혁’이라는 함의에 나는 일거에 빠져버렸다. 그런 와중 대학 1년 초(날짜까지 기억난다. 1985년 5월 23일이다) 취중에 우연히 고른 책, 자취방에 돌아와 몇 장 넘기다가 급기야 울면서 새벽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책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원제,『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다. 1970년 청계천 봉제노동자들 참혹한 삶을 연민하면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스스로 불살라 죽어간* 전태일 삶은 나로 하여금 단숨에 ‘소유’니 ‘존재’니 하는 사변들을 일거에 허접쓰레기로 여기게 했다.

이 책으로부터 ‘질풍노도의 시대’를 맞은 듯 하다.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해야 할까. ‘민중 삶을 구조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한 운동’만이 필요한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 도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난 이는 마르크스다. 1988년 방위병 복무 중 휴가나온 길에 당시 비합법적으로 출판된 『공산당 선언』 팜플릿을 후배가 사 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시외버스 안에서 품속에 넣은 그 책을 읽을 생각에 얼마나 가슴이 쿵쾅 거리던지…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새벽까지 단숨에 읽고 마지막 구절을 소리 없이 연신 외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튼 그랬다. ‘책’을 소재로 나마 지난 시간을 반추하다 보니 밀려드는 감회를 어쩌지 못해 사설이 길어졌다. 돌이켜보면 청춘의 초상은 이상(理想) 그 자체 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이제부터 쓰고자 하는 노자의 『도덕경』을 만나기 위한 긴 여행였는 지도 모르겠다.

 

2

도덕경

『도덕경』은 수배-구속-제적-노동 현장, 그리고 입산 생활이라는 곡절을 거쳐 어느 날 우연히 만났다. 내게 『도덕경』은 역설과 직관으로 가득 찬, 지혜로 번득이는 잠언집이었다. 그것은 도(道)가 사라지고 학(學)과 술(術)만이 판을 치는 현대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지식이 폭발하는 반면 지혜는 간 곳 없는 이 시대에 더욱 그렇다.

이 글은 노자의 생애나 도덕경 전체 개괄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다만 노자의 핵심사상이랄 수 있는 도(道)와 무위(無爲) 개념에 대해 내 나름 이해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로부터 현대인 삶에 대한 메시지를 얻는 방향 하에서 도덕경 몇 구절을 인용하고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1) 도(道)
도가 무엇일까?
보통 노자에 대한 해석자들에게 있어서 도는 만물의 본체 혹은 그러한 실체를 파악하는 방법론(Way), 실체를 파악하는 주체인 이성(Logos) 등으로 이해된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는 항상 하는 도가 아니며 이름은 영구불멸의 이름이 아니다.”(1장)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주1)

내가 생각기로 인간 언설 중에서 이와 가장 흡사한 대목은 석가모니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중 하나인 다음 구절이다.

“모든 상(相)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如來)를 보리라”

석가모니가 말한 여래는 궁극적 실재 – 즉 도와 같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도(道) 혹은 여래는 상대적인 지식 또는 분별지(分別知: 일체로서의 세상을 조각돼 상대적으로 파악한 지식)로 파악된 세계로서 ‘지식’과 분별된다(고 한다). 우리는 분별지로 파악된 사물을 일러 ‘개념’이라 한다. 예를 들면 위에 써진 모들 글들- 세계 분별지,~이다…이런 것들이 그렇다. 개념은 하나의 이미지 곧 상(相)이다. 예컨대 ‘나’라는 개념이 있다면 이 개념 즉 상(相)을 통해 내 것, 내 가족, 내 신념 등등 다른 개념이 파생되는 식이다.

그런데 선지식들에 의하면 이 ‘개념’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분별지에 의해 파악된 상, 즉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가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어 말하길 ‘이름은 영구불변의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이름’은 개념이다. 개념은 전체로서 우주를 하나씩 나누어 보면서 생겨난 것이다. ‘분별해 놓은 것끼리 특정한 일반화’, 다시말하면 같다고 생각하는 것끼리 생각으로 나누어 보면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

예컨대 남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라는 이미지 즉 상(相)이 생겨난다. 그래서 석가도 유명한 게송을 남겼다.

이른바 저것이 생김으로 인해 이것이 생기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생각키로 이는 도덕경 1절 언설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내가 보기엔 이렇다.

개념 즉 ‘이것’이 생기자 ‘이것’을 형용하고 서술하는 온갖 사유가 발생한다. 그리고 다시 사유의 수단인 ‘개념’은 서로 합종연횡하면서 논리와 유추가 생겨난다. 마음은 원래 공(空)한데 분별로 비롯된 온갖 생각 즉 사유가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가라앉히기도 한다. 개념 때문에 고(苦)가 시작된 것이다.

본래 일체가 통일인 줄을 알고, 개념은 그것의 파생된 상(相)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 곧 이름이 이름이 아니고 도가 아닌 줄을 알면- 그러한 분별 이전의 세계 즉 궁극적 실체로서의 만물의 통일을 보게 된다(고 한다). 상이 상(相) 아님을, 개념이 아닌 공(空)함을 보고 분별이 그릇된 상(相)을 나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상(相)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림으로서 만고(萬苦)가 일어나는 이치를 분명히 보게 될 때 우리는 자연 세계에 진정으로 복귀한다. 따라서 감각 분별의 산물인 이름이 이름이 아니요, 도가 도가 아니라는 언명은 전체 도덕경의 핵심이요 커다란 깨달음의 요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이름에 집착한다. 상(相)에 머무른다. 예컨대 사람들은 나를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한다. 과연 ‘나’는 ‘나’일까.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나’라고 칭해지는 한 물건이 세상의 나와 부딪히고 자라오면서 맺은 수많은 인연, 그 인연들 속에서 얻게 된 온갖 분별과 경험의 총화에 불과하다. 이렇게 대상과 구별(분별)되어 얻게 된 이미지를 ‘나’라고 여길 뿐이다. 역으로 내가 ‘나’아님을 알 때, 즉 항구 불변의 이름이 아님을 알 때 ‘나’라는 상(相)으로부터 비롯돼 온갖 상념들, 예컨대 ‘내 것’,’내 가족’ 등등이 허상인 것을 알게 된다. 즉 그에 대한 집착이 허망한 것을 안다.

그러한 착각(불교식으로 말하면 전도몽상’)으로 부터 자유로운 것이 참다운 자유이다(라고 한다). ‘내 것’은 단지 내 몸이나 소유물만이 아니다. 나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들이다. 신념, 가치관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좇아 선과 악, 너와 나 등 이름(상)에 의한 분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을 내려놓은 것이 도이다. 도를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곧 번뇌와 일체고(一切苦)로부터 해탈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는 이러한 긴 언설을 잘라 말한 것이다.

“도는 도가 아니다”

 

(2) 무위(無爲)
앞서 말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으면서 그가 인용한 노자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책 프롤로그 끝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존재는 도다- 노자’

도덕경을 읽고 난 후에야 이 말을 조금은 알 듯했다. 존재는 어떻다는 말일까. 노자는 말했다.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하늘과 땅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 살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7장, 天支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故能長生)

자연 즉 존재는 애쓰지 않는다. 존재는 무위(無爲)다. 도는 존재다라는 말은 곧 도는 무위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무위자연이다. 그러나 인간 당위(Sollen) 혹은 가치(Wert)에 이끌려 살아간다. 예컨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혁명을 해야 한다’ 등등. 하지만 자연에는 당위가 없다. 가치가 없다. 시비가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당위에 이끌릴 뿐이다. 이런 무위와 당위, 혹은 무위와 유위(有爲) 간 대립은 노자 당대에도 있었다.

공자 사상은 그러한 당위 철학의 최고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자와 공자가 실제로 만났다는 설도 있다. 만약 공자가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면 노자는 “잡을 게 없는데 버릴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일갈 했을런지도 모른다. ‘어떠어떠해야 한다, 혹은 이렇게 저렇게 하자’라는 말은 노자는 조소하기 때문이다. 당위에는 ‘싫다’가 전제되어있다. 애써 돌이키는 것이 다 유위(有爲)이다. 본래 당위가 부질없음을 알면 지식과 인의(仁義)가 부질없음을 안다. 그래서 노자는,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나오게 되고 지혜가 없어지니 대위(大爲)가 나오게 되었다.”(18장, 大道 廢 有 仁義, 知慧 出 有大爲) 주2)

라고 말한다. 당위가 무위를 압도하면서 인간은 예컨대 ‘무엇’이 되고 싶어한다. 공자가 추구하는 군자(君子)가 그렇다. (마르크스가 추구하는 혁명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노자는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이로움을 주면서 다투지 않는다.”(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以不爭, 處衆人之所惡)

라고 ‘물’이 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꽃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노자는

“세상 사람들은 다 유능하고 쓸모 있으나 나 홀로 고집 세고 촌티 나는 구나!”(20장, 而我獨頑似鄙)

라고 탄식했을까?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무한한 자연 세계에서 자기 존재란 한낱 들풀과 다르지 않다. 그 풀이 어떻든 무슨 상관일까. 자신이 상대적 존재임을 알면 붉은 꽃이 되려는 집착이 하등 쓸데없음을 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양 착각할 때 집착 속에서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인간사회의 모든 비극의 원인은 그러한 욕구에 대한 집착(그것이 당위의 가치로 포장되어있다 하더라도)과 더불어 지식의 발생이라고 본다. 여기서 ‘지식’은 앞서 말한 분별지이다. 사실 모든 지식은 분별지이다. 그래서 노자는

“학문이라는 것을 없애면 인간에게 근심이 사라질 것이다.”(20장, 絶學無憂)

라고 말했다. ‘인간은 어떤 어떤 해야 한다’라는 ‘당위’가 인문학과 철학을, 그리고 ‘세계는 어떠어떠하다’가 자연과학 즉 분별에 의한 지식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이 과정은 무위 즉 도가 사라지고 인위와 당위가 압도해가는 과정이다. 학문이야말로 당위의 뿌리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생산돼 지식과 정보, 거기에 자기 경험을 가미해 파악된 상을 맹신한다.그러나 그것이 자기 경험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거나 부정한다. 곧 각자에게 파편화된 세계일 따름이다.주3)

시대는 이런 것 같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난다. 게다가 욕망은 끊임없이 부추겨진다. 세간은 뒤틀리고 진실은 질식당하며 탐욕의 응결체인 권력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민중의 정신을 짓밟는다. 그로부터 비롯하는 모든 인간의 갈등, 혼란, 그리고 좌절과 냉소, 불안…….지자(知者)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현자(賢者)는 절망한다. 그리고 도인(道人)은 침묵한다. 어찌할 것인가. 노자의 <도덕경>은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답이라면 누가 들으려 할까?

 

3

나가며
내게 도덕경은 일종의 열반과도 같았다. 사회 변화에 대한 갈망과 개인적 욕구 사이의 갈등과 불안은 날아가 버렸다. 도덕경은 내가 읽었던 그 어떤 글보다 충격적이었다. 지친 영혼을 고요히 쉬게 해줬다면 과장일까. 노자의 다음 말로 두서없는 글에 대한 죄송함을 대신하며 졸필을 맺고자 한다.

“말은 많이 할수록 통하지 않게 되니 마음속에 간직해 두는 것만 못하다.”(5장, 多言水窮, 不如守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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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道可道非常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주1)
주1) 도덕경 1장은 언명은 <금강경>만이 아니라 불교의 또 다른 핵심경전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則是空 空則是色)’이라는 구절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색은 감각(오온; 五蘊-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범주의 요소, 곧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색, 감각의 수, 인식 작용의 상, 의지 작용의 행, 마음 작용의 식이다)에 의해 파악된 세계에 대한 상(image)을 말하는데, 이 상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허황한 듯 들리나 양자역학 등 현대물리학에 의한 “물질은 곧 에너지이다”라는 법칙 및 뉴트리노 등 지구를 관통하는 미립자 발견 등의 과학적 사실에 의해 증명되는 추세에 있다.

+2013년 참고 김대식교수 강의 


*大道 廢 有 仁義, 知慧 出 有大爲 주2)
주2) 한국의 번역자들은 위 구절 중의 대위를 ‘큰 거짓'(노자 도덕경 1993 김석환 글) 또는 ‘대 협잡'(백서 도덕경, 박희준 까치출판사)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제 생각에는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혹은 하고자 하는 당위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 없어지니~’부분도 대부분 ‘지혜가 나오면서~’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이 역시 제 생각에는 지혜가 사라진 후 대위(또는 당위)가 나온 것으로 번역해야 옳다고 본다.


+주3) 물론 세상은 불합리하고 모순투성이이다. 그렇다면 노자는 사회개혁, 혹은 혁명을 조소할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다만 혁명을 추동하는 주체들의 아상(시비와 분별 때문에 “내 신념”이 옳다는 생각)을 조소할 것 같다. 말하자면 ‘객관에 대해서는 시비를 분별하되’, 주체는 시비를 벗어나길 요구한다고 할까. 이 주3은 40대를 넘긴 최근 추가한 것이다.

 


작성 : 1995년 5월 작성(2012년 12월 주3 추가)

 

+2020년 2월 추가

*참고: 전태일 유서 중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깎아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려야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적혀진 유서